사진 언어에서 어떻게 콘크리트 장벽을 내 몸으로 간주할 것인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표현이 수면에서만 놀게될까봐 걱정이다. 이미지에 개입하는 에로티시즘 역시 표상적인 수준에서 머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동시에 여기서 더 이미지를 꼬아버린다면 모든 요소가 탈락될 수도 있다. 지난 금요일, 재훈, 서정, 재원과 모여 퀴어 예술의 전형적인 코드와 포르노그래피적 속성을 벗어나는 신체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마다 수용하는 코드와 그려놓은 속성이 다르기에 이 해답은 여전히 작업자의 머릿속에서 맴돌 예정이다. 당장 직관적인 사진으로써 표현하는 방식은 일종의 나와 장벽을 동일시 하기위한 워크샵 정도로 간주하지만, 그 다음 단계에 대한 고질적인 질문이 있다. 이 이미지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타개할 지점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난 회의 때 예린이 언급한 ‘쌍방으로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장벽이 된 나, 몸의 해방을 위한 성행위가 어떤 쌍방에게 영향을 주는 것일까. 장벽과 나? 타인과 나? 여전히 답을 알 수 없다.
드로잉은 계속해서 손이 가는대로 그리고 있다. 일종의 가두는 감각에 대한 시도로 형태에 있어서 갇힌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다지 갑갑한 기분은 들지 않으며, 대지의 프레임이 사용되었다는 인상도 없다. 재료가 바뀌면서 다른 레이어들이 등장할텐데, 이때 빛의 확장, 다시말해 파스텔과 색연필로 올릴 레이어가 대지의 프레임에 갇히고 방향을 틀고 제압당하는 형상은 사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펜으로 그리는 레이어가 ‘이 정도면 다 쏟아낸 것 같아’라는 감각을 줄 때까지 그려내야한다. 이 드로잉에게 충분한 시간과 무게를 줘야한다. 사진 언어가 새로운 신체를 가지면서 나타난 드로잉이고, 그 형상 역시 사진을 통해 만든 이미지에서 비롯한다. 때문에 이는 지금까지 내가 얻은 ‘사진에 새로운 신체 주기’의 첫 결과물(진행중인)이나 진배없다. 아마도 완성된 드로잉이 전시에서 전면에 나설 것이다.
신체 실현 시도에서 취할 것
신체 실현 시도 결과에 대한 텍스트
신체 실현 시도에서 덜어낼 것
신체 실현 시도 결과에 대한 텍스트
이지희
사진 작업에 관해 이야기한다. 장벽과 해방을 갈망하는 나에 있어서 손가락을 넣는 콘크리트의 이미지가 더 딱딱해지는 것을 연상한다. 손가락이 들어가는 행위가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단단함이 강화된다면, 어쩔 도리가 없는 자신의 견고한 제약에 대한 무기력함과 허무가 더 전달될 것 같다.
몸을 촬영한 이미지는 해방을 위한 행위로 와닿았다. 그 행동들이 장노출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감각을 자극한다. 애쓰고 발악하는 감각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 역시 손가락으로 콘크리트 깎아내기와 같다.
해방이 되고싶은가?
상운:
여기서 해방은 사실상 비논리적이다. 내가 해방되고싶은 제약이자 장벽인 내 몸은 곧 내 전부이고 내 근원이므로 여기서 해방된다는 것은 내가 나로부터 나오고싶다는 말과 같다.
김예린
사진 작업에 관해 이야기한다. 손가락을 콘크리트에 넣는 행위를 변주하는 것을 연상할 때, 콘크리트가 굳기 전에 신체가 침입해서 자국이 남는 모양새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비춰지는, 그러니까 지희의 피드백과 반대의 방향인가 싶어 고민된다.
차라리 아예 콘크리트가 아주 단단하고 무결한 감각으로 표현되어도 좋을 것 같다. 아주 정제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지현
탈북이라는 경험을 통해 외국에 국적을 두고있는 친지를 통해 이야기했다.
침대 위라는 장소에 대한 연상이 일종의 장벽처럼 느껴진다.
상운:
일단은 이미지가 나오는 것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두 유형의 이미지 전부 별다른 요소를 추가하거나 덜어내지는 않았다. 굳이 이제부터 손을 쓴다면 덜어내는 쪽이 맞지 않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