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기전 회의에서 지희의 언급을 통해 다시금 이미래 작가의 작업에서 에로티시즘의 역할을 상기했다. 이는 곧 이동을 통해 서울과 그 이름이 상징하는 모든 제약이 해소되지 않았기에 나는 섹스를 통해 몸을 해방시키고자 발악했는지 질문했다. 몇 달 전 장벽이라는 개체를 내 신체와 동일시하는 데에 이르고 그것을 이미지로써 보여주기 위한 가장 끈적이는 방법이 에로티시즘을 전면에 드러내는 방법인지 고민했다. 당시에는 이를 사용하는 것이 너무 섣부르고 곧바로 자극적인 이미지만 만들어낼까 우려해 보류했던 바가 있다. 그러나 지난 회의에서 지희가 상기시킨 이미래 작가의 작업을 곱씹으며 나의 감각으로 더 부드럽게 보여줄 수 있다면, 무리해서 욱여넣은 이미지는 아닐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스스로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매니악처럼 더 강렬한 자극과 쾌락을 쫓은 이유를 질문했을때, 어쩌면 더 깊은 밑바닥까지 보고싶은 해방에 대한 갈망인 듯 하다고 답했다. 타인의 가장 은밀한 구석을 발견하고 그 인상이 도시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자리잡게 만들었던 것 같다.
밤엔 연인이 샤워하는 사이에 여자친구의 블로그를 읽고 난 다음 섹스를 했는데 내 머릿속에는 이상한 연대감, 배덕감, 픽셔널리티가한꺼번에섞여있었다. 나를 위해 일해, 더 많이하고 더 잘해, 그러니까 많은 여자들이 어쨌든 남자들과 섹스를 하는 그 당시에는 그것이 모종의 복수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래봐야 두 쪽 다 부드러운 몸을 가진 인간들이기때문에 뭘해도 귀여운 수준이다. 사랑해도 역시 호시탐탐 여러 명의 사람들과 자고싶어하는 것, 그들을 침대로 데려와서 옷을 다 뱃겨놓았을 때 그 사람들을 정복한 느낌에 아주 만족하는 것. 사람들이 인간이기를 조금 포기하는 그 순간들을 목도하는게 정말 좋다. 그런 순간들은 아름답고, 그걸 보며 뭔가를 이해하고, 그럴때면 인생이 살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 이미래 작가의 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발췌
자은이 공유해준 리서치 자료 중 이미래 작가의 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이 쏟아져 나온다. 그녀의 말투를 빌리자면, 왈칵 뿜어져나오는 모양새같다. 그 모양새가 참 부럽다. 내가 이미지에 솔직하면 솔직할수록, 작업에 열리면 열릴수록 반드시 언급되어야하는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길 꺼려하는데, 그런 점을 전혀 개의치않고 덤덤하게 글로 써놓은 그녀의 모양새가 부러웠다.
다시 돌아가면, 지희의 언급에 어떤 결심을 한 것 같다. 몸의 해방을 위해, 그러니까 내 표현으로는 장벽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과 데이트를 하고, 페티쉬 클럽 등에 나를 내던져 어떠한 감각을 얻으려던 발악이 수면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이상 심해에 있을 수는 없다. 어쩌면 이런 시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 기다림은 간지럽고 두근거렸기에,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 반드시 질문하면서 가치를 지켜야한다.
예린이 가지고 온 홍상수 감독의 영화 <탑>을 통해 건물, 개인, 그리고 해체와 영화 언어로 말하기에 대해 동시에 생각했다. 독일에서 작업한 단편 필름은 그 완성도가 마음에 들지않아 온갖 고생을 하며 얻어낸 소스 파일조차 열어보지 않았다. 언젠가 저들에게 새로운 몸을 주리라 다짐만 한 것이 몇 달 째이다. 이동에 수반하는 개인의 해체와 연옥에 갇힌 듯한 감각이 중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더욱 무섭기에, 실제로 콘크리트로 빚어진 장벽을 보면 안도한다. 일종의 멀미와 같은 것인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데 창 밖의은 파노라마가 펼쳐지기에 생기는 인지부조화와 같다. 그 해결은 둘 중 하나인 듯 하다. 실제로 날 가두고있는 장벽을 두 눈으로 보거나, 장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한다. 장벽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지금 내게 사진 언어로 풀어내야하는 과제라면, 장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발악들과 같다. 최대한 멀리, 최대한 다른 문화권으로 도망가기와 최대한 많이, 최대한 자극적인 섹스였던 것 같다.
단편 필름 소스 중 하나는 노이즈가 가득한 화면에서 내가 슈투트가르트의 방에 앉아있다. 그 텅 빈 방에 앉은 나를 왜 찍고싶었을까. 그냥 나르시시스틱한 셀프 포트레잇은 아니었다. 그날 그다지 나서고싶은 몰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소스 파일들을 되짚어야겠다.
오늘 이 노트를 적당히 써두고 드로잉을 이어갈 것이다. 모든 것이 한 단계 맞아떨어지는 기분이다. 장벽을 찍은 사진 속 갈라진 콘크리트 틈 사이로 보이는 철근이 주는 솔직하고 야릇한 기분은 어떻게 이를 내 신체로 보여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줄 것 같다. 나의 집은 오래된 아파트에 있어서, 노출 콘크리트 블럭이 많다. 그 틈새 또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볼 것이다. 남의 손가락이 내 몸에 들어오는 감각을 상기시키면서. 드로잉에도 장벽의 텍스쳐와 함께 거대한 균열이 생길 것이다. 그 콘크리트 균열은 마치 성운이나 은하의 단면과 같고, 안쪽의 철근은 해무리처럼 솟아오르며 빛이 날 것이다. 어떻게 거친 감각을 그려낼 것인가 질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