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대해 묻는다.
내가 태어난 시점부터의 서울을 만든 역사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만들어진 것이 중요하다. 구사하는 언어는 곧 알고있는 세계. 내 모든 사고는 서울이라는 언어에 기반하고, 그것은 냉전으로 인한 경계, 아파트 유목민, 집단이라는 우물에 가두는 구조, 자본주의적 욕망 등에 얽혀있다. 사실 이들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들이 별자리처럼 주관적으로 조합되어 만든 수 백만의 개개인을 언급해야하며, 나는 그들 중 하나이다. 균형을 이야기한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체화하고 콘크리트에서 처음 걸음마를 떼고 철재 갑옷을 입는 도시 인류 중에서도 서울이라는 장소특정적 속성을 가질 때, 그것에 수반하는 이점과 제약의 균형을 이야기한다. 제약이 우세한다는 것을 느낀 순간, 서울로부터 도망치겠다는 생각을 한다.
장벽에 대해 묻는다.
도시가 가진 다양한 속성 중에서도 베를린의 장벽은 서울이 가진 모든 눈에 보이지 않는 제약을 솔직하게 가시화한다. 징병제, 사상 갈등, 이단아와 모범시민, 여성과 남성 등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분법을 여과없이 적용할 좋은 오브제이다. 화려한 자본 신체를 두른 도시에서 훼손되고 붕괴되고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솔직한 구조물, 더없이 건강해보인다.
나에 대해 묻는다.
나를 묶는 이름, 그 이름의 모든 배경을 제공한 서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새로운 신분으로 7개월 간 살았다. 국적, 성씨의 독일식 발음, 지향성 등에 있어서 모두 내가 통제하고 원하는대로 설명한 신분이었다. 그 신분이 견고해질수록, 새로운 신분을 만들 모든 자양분 역시 서울에서 왔음을 인지했다. 이때 나는 ‘내 몸에 밴 지하철 2호선의 퀘퀘한 냄새와 한강 물비린내는 온갖 바디워시로 씻고 프랑스제 향수를 뿌려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동에 대해 묻는다.
섬이 된 반도, 정전선 역시 장벽이다. 대륙 진출 경로라는 이유로 강제점령을 당했고, 그래서 분단이 되었는데 되려 그 때문에 섬이 된 역설적 운명이다. 이 모순된 성향은 곧 나의 성격이 되었고, 수 백만 서울 사람의 성격이 되었으며, 한국인의 성격이 되었다. 기차로 국경을 건너는 경험은 서울이라고 부르는 내 제약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처음으로 장벽을 넘은 것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몸에 대해 묻는다.
일련의 네 가지 생각들은 모두 뒤섞여 내 몸이 되었다. 도시에 눌러붙어 철근과 콘크리트는 뼈와 살이 되었다. ‘완벽한 이동은 없어, 늘 장벽이 따라오므로.’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내 신분은 곧 제약과 동일시된다. 이동은 욕망이 되고, 바다를 건너야한다는 맹목적인 사명만이 남았다. 이 모든 것이 도시와 건축이라는 내 오래된 언어로 드러난다. 아마 이 번역 과정이 디자인을 학습하며 얻은 내 프로세스일 것이다. 파란 종이 위에 그려진 흰색 지도 드로잉, 베를린에서 찍은 영상과 사진, 서울로 옮겨온 베를린 장벽의 이미지, 내 몸을 찍은 셀프 포트레잇으로 흩뿌려져 양산된다. 이들에 어울리는 신체는 무엇인가. 이 산발적인 이미지들이 올곧게 모일 수 있는 신체는 무엇인가.